나_라는 세계의 발견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기본적인 목적 의식은 '언어의 명료화'이다. 전기와 후기 철학에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으나 목적 의식은 동일하다. 언어에서 기인하는 오류가 있다.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료하게 구분해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를 통해 많은 철학적 문제들이 해소된다.
사적 언어와 내면-외면의 문제
언어의 의미는 사과나 찻잔처럼 확실히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말의 주고받음 속에서 제대로 말을 쓰고 있는지와 깊이 연관된다. 안쪽에 '의미' 부분이 있어서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말이 처음부터 쓰이고 있고, 그 말을 제대로 (다른 사람이 위화감을 갖지 않도록) 대화에서 쓸 때 비로소 '의미'가 되는 것이 있다는 느낌이다. (...) 그 말과 관련한 '대상'도 아니고, 그 말에 따라 떠오르는 '이미지'도 아니다. 하지만 만약 '의미'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말을 제대로 쓰고 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나타나듯 탐구에서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언어 놀이, 즉 말이 실제 사용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혼자서만 알고 있는 사적언어는 가능한 것일까? 예컨대 고통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나는 내가 느낀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 "아프다", "콕콕 찌른다", '얼굴 찡그리기' 등의 언어적 표현을 할 수 있고, 실제로 우리는 위와 같은 표현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짐작하곤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철저하게 사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표현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어떤 돌이 고통을 느끼는데 아무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고통을 표현한다고 해보자. 예컨대 그대로 가만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이 돌의 고통을 모른다. 그렇다면 돌이 겪는 것을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무언가가 돌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고통'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의 의미는 일련의 규칙에 의해 지탱되기 때문이다. 일단 고통 받을 몸이 있어야 하고, "아프다", '얼굴 찡그리기' 등 합의된 표현이 있다. 좀 더 확장해서 '식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를 생각해 보아도 자극에 대해 특정 반응이 나타나는지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고통의 가능성을 점친다. 이러한 것들을 배제한 상태로 고통이 세계에 등장하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사적인 것은 결코 언어화될 수 없고, 언어화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사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바깥쪽 언어'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적 언어 문제는 내면과 외면의 문제로 이어진다. 고통의 예시에서 보았듯 우리는 내면의 고통을 언어 놀이에 따라서 표현한다. "(얼굴을 찌푸리며) 콕콕 찌르듯, 10점 만점이면 8점 정도로 아프고..." 그런데 이렇게 표현된 언어는 내가 느끼는 고통 그 자체와 동일한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완벽히 표현하려해도 듣는 사람이 내 고통을 직접 느낄 정도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타인의 고통을 언어를 통해 짐작할 뿐 결코 직접 느낄 수는 없다. 그런데 이는 말하자면 이전에 예시로 들었던 돌의 고통과 같은 철저한 사적 영역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렇게 언어화 되지 않은 내면은 고통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안쪽 사정을 정확히 나타내려 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바깥쪽 언어를 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쯤 되면 의문이 든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고통에 대해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으며, 고통의 철저한 사적인 영역은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같은 단어인 '고통'이라고 부르며 의사소통하고 있는 것인가?
좀 더 명료하게 질문을 다듬어보자; 우리는 나의 고통만을 알뿐 타인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통'이라는 공적인 단어를 어떻게 습득하게 되었는가? 나의 고통을 느끼는 것과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것은 고통의 근원지를 제외하면 동일한 의미를 갖는가?
대상 개념의 소거
"그러나 이때 그 사람들이 '딱정벌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사물의 이름을 사용하는 방법과는 다를 것이다. 상자 속 사물은 절대 언어 게임의 일부가 아니다. 무언가 있는 것조차 아니다.
우선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선 대상이라는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실재하는 대상이 있고 그것을 확인함에 따라 지칭하는 언어가 생긴다는 생각은 문법에서 기인한 오류이다. 대상은 플라톤의 이데아나 칸트의 물자체와 같이 형이상학적 논의를 다시 불러온다. 우리는 대상(딱정벌레 또는 타인의 내면의 고통)을 본 적 없이 이미 대화를 하고 있으며, 일부 오류 가능성이 있지만 대개 대화는 잘 이뤄진다. 어느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딱정벌레가 있다고 가정하고 들어가면, 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언어 놀이가 오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문제(결함)를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대상의 환영에서 벗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언어 놀이는 (대상이 아닌) 그 사용에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문법은 변화 가능한 것이며 불확실한 토대 위에 놓여있다. 대상을 보지 않고도 사용에 따라 대화가 잘 이뤄지고 있는 것이 실제 언어놀이라면, 볼 수도 없는 대상을 전제할 필요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류 가능성(마찰)은 결함이 아니라 본디 언어 놀이의 한 부분인 것이다.
중심축 명제와 언어 놀이의 습득
"이 역설이 지워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시각에서 확실히 손을 뗐을 때뿐이다. 곧 '언어는 하나의 방식으로 기능한다. 집, 고통, 선과 악, 그 외 어떤 것에 관한 생각이든, 생각을 전달한다는 같은 목적에 봉사한다'는 시각을 버릴 때뿐이다."
대상 개념과 마찬가지로, 언어가 하나의 방식으로 기능한다고 착각하는 문법적 오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예컨대 '(나는) 나의 고통을 안다'와 '(나는) 타인의 고통을 안다'는 문법적으로 매우 닮았다. 그래서 고통의 근원지인 사람만 다를 뿐, 목적어인 '고통'이나 '안다'는 동사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가? '타인의 고통을 안다'에서 앎은 오류 가능성을 내포한다. 내가 생각한 저 사람의 고통이 진짜 그러한 고통일 수도 있고(참),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거짓). 반면 '나의 고통을 안다'에서는 오류 가능성이 논리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내가 생각한 나의 고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은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통은 나에게 앎이 아닌 확실성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이 확실성은 앎의 참 거짓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즉, 우리는 나의 고통(확실성)을 통해 타인의 고통(앎)을 판단한다.
"아이는 어른을 신뢰함으로써 배운다. 의심하는 것은 믿는 것 다음에 온다."
확실성은 언어놀이를 습득하는 과정이다. 이는 언어놀이가 마찰을 통해 수정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참 거짓을 따진다는 것은 의심을 한다는 것인데, 의심에는 반드시 어떠한 믿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거기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의심이 닿지 않는 믿음을 중심축 명제(경첩 명제)라고 부르며 이를 바탕으로 언어놀이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중심축 명제는 마치 논고에서의 논리형식과 같이 경험 명제들이 가능하게끔 하는 조건으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이 또한 말해질 수 없는 것에 속한다.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말을 일상에서 하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나의 고통을 안다', '나는 뇌를 가지고 있다', '지구는 존재한다' 등등. 다만 형이상학적 논리형식과는 달리 중심축 명제와 일반 명제의 관계는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예컨대 '인류는 달에 간 적이 없다'는 명제는 1969년 아폴로 11호로 인해 중심축 명제에서 거짓 명제가 되었다.
어렵지 않은 용어로 명료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특히 사적언어, 내면과 외면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전기와 후기를 단순 비교하는 비트겐슈타인 해설서가 많은데, 이 책은 사적 언어 - 내면과 외면 - 대상 - 가족 유사성 - 확실성 - 중심축 명제 - 언어 학습 등 다양한 주제들을 언어의 명료화라는 일관된 목적의식으로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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