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주의 좌파 ─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다윈이 자연의 역사를 발견했고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에 대한 법칙을 발견했다는 식의 사고는 훨씬 더 근본적인 결함을 갖는다. 이러한 단순한 구분의 배후에는 다윈의 진화는 인간 역사의 시작과 함께 중단되었고, 이제 그 자리를 역사유물론이 이어받았다는 식의 관념이 숨어 있다.
정치 사상가들이나 혁명가들 혹은 이들을 추종하는 사회개혁가들은 너무 쉽게 이상 사회의 상을 만들어내는 반면, 정작 그렇게 만들어질 이상 사회에서 일하고 살아나가며, 또 그 이상 사회를 향한 계획을 추진해나갈 주체인 인간에 대해서는 알고자 하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다. 만일 자신들의 계획대로 일이 잘 진행되지 않으면, 내부적으로는 변절자를 탓하고 외부적으로는 악당을 하나 만들어 비난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인간에 내재한 경향성을 이해해야 하며, 여기에 맞추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을 수정해나가야 한다.
두 번째 입장은 사회생물학 혹은 진화심리학에서 제시하는 여러 명제들을 사실이라고 간주하지만, 그것과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식의 입장이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양육에 특화되도록 진화해왔다는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육아나 가사활동에 전문화되어야 한다는 '당위'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이 이기적 본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간은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가치'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외부인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해서 집단 간의 갈등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등등. 더 나아가 여성이 육아에 특화되도록 진화해왔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성의 사회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이 필요하며, 인간이 이기적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타인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위해 함께 노력하도록 동기부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세밀한 유인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며, 인간이 외부인에 대해 적대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인종 차별이나 자민족 중심주의적 태도나 집단이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는 임무가 부여되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문제에 관련해서는 사람들이 어떤 근거로 내부인과 외부인을 구분하는지(그것이 인종인지, 민족인지, 성인지, 아니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른 구분인지)를 알아내는 것도 차별 없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든다는 가치를 추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입장과 비교되어야 하는 세 번째 입장은 (피터 싱어가 간과하고 있는 입장인데) 사회생물학에서 제시하는 여러 명제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적어도 현재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양육에 특화되도록 진화되었다는 말을 어떤 근거를 사실로 판단할 수 있을까? (...) 인류의 긴 역사가 남성은 사냥을 전담했고 ,여성은 채취와 가사를 담당했다는 증거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가 집단 간 갈등과 폭력의 역사라고 해서, 그리고 우리가 외진 곳에서 얼굴색이 다른 누군가를 만날 때 두려운 생각이 먼저 든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들이 본성상 그럴 수밖에 없는 건지 아니면 사회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건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세상은 항상 변화하며, 필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호작용에 따라 그때그때 방향성이 결정되는 그러한 변화 경로를 따른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기존 좌파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변이 필요하며 다윈주의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각 정당에서 자기 입맛에 맞게끔 주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파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종의 경쟁을 끝없는 경쟁 사회와 작은 정부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주장한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좌파의 역사적 유물론은 물질적 삶의 양식이 인간 사회를 결정하므로 주어진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다윈주의가 인간 사회가 아닌 자연 환경에 국한된 것이라는 함의가 숨겨져 있다.
이러한 과거 비다윈주의적 좌파의 주장은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마치 공산주의와 같은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얼핏 보기에 마르크스주의의 비현실성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가치판단에서 '인간과 동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라는 전제를 깔곤 하는데, 비판 없이 이를 수용하는 것은 '진화이론은 옳지만, 인간은 예외다'라는 마르크스주의 혹은 기독교적 교의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나의 과거를 돌아봤을 때 연령, 시대에 따라 그때그때 유행하는 정치관이 있고, 본인의 자아상이나 당시 겪은 개인적 경험은 가치 판단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여기로부터 자유롭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그것은 굳은 의지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집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 흐르고 여러 경험이 추가되면서 가치관을 수정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면 두 가지 정도의 생각이 든다. 첫째는 내 가치관이 점점 보완이 되고 있구나, 둘째는 나의 믿음이 계속해서 배신을 당하고 있으니, 도대체 진실은 무엇인가?
전역 후에는 후자의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직장 생활을 하는 지금은 사실 충분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언제나 급급하고, 조급해지면 생각을 멈추고 관성에 따라 판단하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 이 책으로부터 비판적 시각에 대해서 환기할 수 있었다.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는 것, 그리고 연역되지 않은 경험 명제들이 얼마나 사실적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 개인적 부를 쌓는 것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지출되는 또 다른 비용(희생)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한다. 부자와 빈자가 철저히 분할된 사회에서는 모든 외부인이 경계 대상이 되며, "결코 개인적으로 부유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
꼬치꼬치 캐묻고 세세하게 논증하는 과정은 사실 매우 피곤하고 지루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를 덮어두고 외면하는 듯한 묘한 찝찝함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리고 편견에 가려진 진실을 끄집어내는 그 짜릿한 느낌을 원한다면, 반드시 계발해야 할 덕목이다.
<이타적 인간의 출현> 저자인 최정규 교수가 옮긴 책으로, 개인적으로는 본문보다도 옮긴이의 해제가 아주 간결하고 명료해서 좋았다. 책과는 별개로 없던 독해력마저 점점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데... 일단 계속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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